1) 나주 조사위원회
① 나주 조사위원회 결성과 그 배경
율리아님이 모시고 기도하던 성모상이 처음으로 눈물 흘리신 날은 1985년 6월 30일이다. 성모님께서는 그 해 7월 18일, 첫 번째 사랑의 메시지를 주셨다. 그 뒤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고, 나주를 순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친지들도 영적, 육적 치유가 일어나면서 수많은 열매가 열렸지만 광주대교구는 10여 년 가까이 어떤 조사 활동도 하지 않았다.
1994년 11월 24일, 주한 교황대사인 죠반니 불라이티스 대주교님께서 나주성모님 집을 방문하여 두 차례의 성체강림 기적을 목격하고 즉각 교황님께 보고하였다. 그리고 “광주대교구에 이러한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는 나주 성모의 집을 왜 이제까지 조사도 않고 있느냐?”고 질책하며 한국 교회의 주교단과 장상들에게 자신의 은총 체험을 전하였다. 그러자 광주 대교구는 1994년 12월 30일 ‘나주성당 윤 율리아와 그의 성모상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과 메시지에 대한 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조사위원회에는 조사위원회를 주도한 장용주 알베르또 신부를 비롯하여 위원장에 김재영 아우구스티노 신부, 이제민 에드워드 신부, 리순성 베드로 신부, 장세현 미카엘 신부, 진용민 핀바르 신부, 김무웅 율리오 신부, 정종표 토마스 모어 신부, 조철현 비오 신부 총 9명으로 구성되었고, 1995년 1월 9일 첫 회의를 하였다. 조사위원회는 조사를 하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자들이 나주 순례를 하지 못하도록 1995년 6월 15일 부정적인 중간발표를 하였다.
반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개인 비서인 투 몬시뇰을 1995년 9월 나주에 보내 “나주 성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율리아 자매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율리아님을 초청하였다. 그리고 1995년 10월 31일, 교황의 소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율리아님이 영한 성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성체 기적을 친히 목격하였다. 그러나 광주대교구는 성체기적의 증인인 교황님의 증언도 듣지 않고, 1998년 1월 1일 공지문을 통해 나주를 단죄하였다.
② 나주 조사 위원회의 성향
율리아님이 모시고 기도하던 성모상이 처음으로 눈물 흘리신 날은 1985년 6월 30일이다. 성모님께서는 그 해 7월 18일, 첫 번째 사랑의 메시지를 주셨다. 그 뒤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고, 나주를 순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친지들도 영적, 육적 치유가 일어나면서 수많은 열매가 열렸지만 광주교구는 10여 년 가까이 어떤 조사 활동도 하지 않았다.
핵 심 위 원 | 주 요 연 혁 |
장용주 알베르또 신부 | - 나주를 반대하는 사제들의 우두머리 - 독일에서 서품 받고, 해방신학에 빠져 남미로 유학해 해방신학을 더 배우려고 하다 교구장이 허락하지 않자 광주 대교구로 복귀 - 정의구현사제단 핵심 사제로 활동 - 2011. 7. 28. 은퇴하여 광주 대교구 원로사목 |
이제민 에드워드 신부 | - 대표적 현대주의 신학자 - 198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기초신학 박사학위 취득) - 1997.5.16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서 서면 경고 -> 주교회의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글 싣지 못하게 됨 - 1998. 1. 15. 교황청 신앙교리성 서면 경고 -> 신학교수직 박탈 |
이순성 베드로 신부 | - 교회의 현대주의적 개혁의 옹호론자 - 독일에서 수학 -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 부정 - 성령께서 예수님보다 신적 우위에 있다고 주장 -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을 부정 -> 신학교수직 박탈(광주 가톨릭대학 계간지 신학전망 1998년 봄 호에 “1차 공지 문에서 나주의 성체기적을 부정한 진짜 이유는 ‘성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임을 받아 들이지 않는 개신교와의 일치를 위해서였다.”는 글로 인해 98. 6. 교황청 서면 경고) |
1995년 6월 16일, 나주 조사위원회는 조사를 아예 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을 이용해 부정적인 공지를 했다. 신자들이 나주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꼼수였다. 그리고 1997년 4월, 죠반니 불라이티스 교황대사는 알바니아 교황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교황대사는 후일 “광주 대교구는 ‘불라이티스 교황대사 때문에 나주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 달라.’는 요청을 계속해 한국을 떠나게 됐다.”고 토로하였다.
이후, 조사위원회는 율리아 자매를 통한 성체기적의 증인인 요한 바오로 2세조차 확인하지 않고, 거짓 증언자들만 불러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9명의 조사위원 중 장용주, 이순성, 이제민 신부 등 나주를 반대하는
핵심사제만 보고서를 갖고 있었고, 이 보고서 책자를 본 적이 없는 조사위원도 여럿이었다. 나주 조사위원회는 처음부터 나주를 부정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만든 기구였던 것이다. 1997년 11월, 그동안 나주에 대하여 “눈물, 피 눈물, 향유 등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너무 많이 봤기에 믿고, 또 메시지도 오류가 없으므로 믿는다. 그러니 이제 열매만 보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윤 대주교는 잘못된 이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나주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다.(constat de non supernaturalitate)”라는 공문을 교황청 신앙교리성에 보냈다.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와 의논하였다. 그리고 1997년 12월, 광주교구장 윤 대주교에게 “나주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인지 아닌지 아직은 확정할 수 없다.(non constat de supernaturalitate)”로 결정하자는 공문을 보내 윤 대주교와 조사위원회 신부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조사를 더 해 “나주의 기적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이다.(constat de supernaturalitate)”로 결정하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교황청 공문을 받은 윤 대주교는 나주를 단죄하려던 공지문을 무기한 연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용주 신부를 필두로 한 반대 세력에 굴복하여 2007년 12월 29일, 광주대교구 사제 송년회에서 공지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98년 1월 1일, 교황청과 협의를 거치지 않은 ‘1차 공지문’ 발표를 강행하였다.